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4 작전 (문단 편집) == 실시 이후의 행보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ktion_brand.jpg|width=100%]] || ||Reichsleiter Bouhler und Dr. med. Brandt sind unter Verantwortung beauftragt, die Befugnisse namentlich zu bestimmender Ärzte so zu erweitern, dass nach menschlichem Ermessen unheilbar Kranken bei kritischster Beurteilung ihres Krankheitszustandes der '''[[안락사|Gnadentod]]''' gewährt werden kann. ''[[아돌프 히틀러|A hitler]]''|| ||'''국가지도자'''[*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 바로 밑의 당 최고위 간부들이다.] [[필리프 보울러]][* 당시 '''당 총통 비서실장 즉 히틀러의 당무 비서실장'''이다.]와 의사 브란트에게 치료에 가망이 없을 만큼 병세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환자에게 병세에 관해 엄격한 감정을 실시한 뒤에 특별히 지명한 의사에게 '''[[안락사|자비로운 죽음]]'''의 처치를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아돌프 히틀러|A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서명한 장애인 학살 승인 서류|| 그리고 1939년 10월 1일 히틀러는 [[장애인]]들에게 강제 안락사를 지시한 살해 명령서에 사인했다. 이전에 강제로 수용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살해당하고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는 일제히 폐렴이나 뇌질환 등을 사인으로 적은 사망 소식 편지가 도달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부적격자'''로 분류당한 이들에 대한 살인은 후에 [[홀로코스트]]의 절멸수용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샤워실이라고 불린 가스실에서 이뤄졌다. 초반에는 아예 굶겨 죽이거나 약물 주사로 살해되었으나 굶겨 죽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물자가 점점 귀해졌으니 독극물조차 점차 희귀해져 버려 결국 [[일산화탄소]] 등을 비롯한 가스가 쓰이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 본인이 가스를 쓸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위 명렁서처럼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가 담당했다. 히틀러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주워섬긴 브란트는 가스실과 병행해 실시한 약물주사처럼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별도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요제프 멩겔레|멩겔레]]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말살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그 죄악이 전면에 대두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사건도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이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실행된 지 2년이 지난 1941년 여름에는 노인들을 겨냥한 새로운 질의서가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안락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못생겼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 주의가 산만해 인식력이 떨어지거나 [[다운 증후군]]이 있거나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 등. 명확할 수도 있고 불명확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도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로 여겨져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http://www.hankookilbo.com/v/ffbda7e5f5054ac99fb274e156bdc3d7|T4 프로그램 관련 한글 기사]]에서 발달장애라고 언급되어 있어 명확한 것으로 보인다.]도 표적이 되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이 경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특별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전단지가 배달되었고 아이들은 비밀리에 각종 [[인체실험]]에 이용되다 목숨을 빼앗긴 후 [[부검]]되어 사라져 갔다. 게다가 이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39년 이후 더 심해져 청소년기에 다다른 아이들까지도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비질환자, 뇌염, [[간질]], [[조현병]] 환자들과 [[치매]]를 앓고 있던 노인들까지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1940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이 T4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으나 나치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전혀 하지 않았다. 허나 이후 계속적으로 프리드리히 폰, 빌레펠트, 폴 게르하르트 등의 [[루터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시작했다. 이후 주교 프란츠 본바워를 기점으로 8월 시위가 발생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전상자가 발생했고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이러한 T4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 참전자와 [[제2차 세계 대전|2차대전]] 참전자(중증 부상으로 인한 장애인)들 중 소수에게 대한 안락사가 실시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T4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이들도 제대 군인들이나 참전 노인들은 아예 대상에 넣지 않았으나 '''그 카를 브란트가 몰래 이들도 포함시켜 생체 실험에 사용했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일부만 알았다. 독일 국민들의 추측과 소문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애시당초 장애인들을 모두 죽이는 정책인데 고의였든 실수였든 전상자 출신 수용자가 많든 적든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부 입장에선 [[참전용사]]나 산업 현장, 특히 군수 관련 분야 종사자가 근무 중 부상을 입으면 선전용으로 우대해 줘서 사기를 올리는 것이 이득이니 당연히 이들은 여건이 되는 한 챙겨 주려고 하며 독일 역시 그랬다. 브란트 등의 일탈 행위 및 행정 오류 등으로 몇몇 참전용사들이 희생된 것이 T4 프로그램에 참전용사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식으로 와전됐다. 이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종교계와 시민들이 저항했다. 특히 종교계의 경우 T4 입안 당시부터 격렬한 항의가 계속되었다. 클레멘스 폰 갈렌[* 사실 이 양반의 이념은 한동안 [[나치즘]]에 가까웠다. [[폴란드]]나 [[소련]]과의 전쟁에 나가는 [[독일 국방군|독일군]]에게 축복 기도를 했을 정도. 하지만 나치의 실상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1941년부터 설교에서 나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히틀러 일당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주교는 공개 강연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명받은 순수한 학생들이 [[하얀 장미]]라는 단체를 만들어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그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1년 히틀러는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나[* 일반적인 설명은 범종파적인 종교계의 저항이 전국민적 봉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다.] 이 조치 이후에도 은밀한 살인은 계속되어 이전의 7만보다 많은 9만여 명이[* 다른 통계의 경우 250,000~350,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중지 선언 이후에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종료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이다.'''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카를 에두아르트]][*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즉 막내 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이며 원래는 [[영국]] [[왕자]]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로 불렸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 삼촌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前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가 사망하면서(똑같은 이름의 외아들이 있었지만 먼저 사망했다) 공작령을 영국 왕실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상속받아야 하는 상황에 왕위 계승자가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요크 공작 조지밖에 남지 않았던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는 당연히 거부했으며 여왕의 3남 코넛 공작 아서와 그의 아들은 조국을 떠나 외국의 군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공작령의 상속을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4남인 레오폴드 왕자의 외아들인 찰스 에드워드에게 공작령이 돌아갔는데 어머니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어린 아들이 [[독일]]의 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 공]]이 자란 곳이기도 했던 코부르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이 "공작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왕족의 의무다"라고 설득하면서 결국 공작령을 상속했으며 이름도 찰스 에드워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바뀌었다.]도 T4 작전에 가담한 바 있다. 또 [[아스퍼거 증후군]]의 발견자로 알려진 한스 아스페르거도 T4 작전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19/0200000000AKR20180419069100009.HTML|#]] 사실 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은 반대 여론이 높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록이나 명령서 등을 사전에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때문에 최초 시행 시 히틀러가 보낸 서신 정도 외에 공식적인 명령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마저도 히틀러 또한 권리라고 했지 의무라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의사 탓으로 돌리고 본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기록이나 명령만 뒤져 보면 처벌받을 사람은 정말 히틀러 포함해서 하나도 없다. T4 프로그램 자체도 내용이 엄청난 것이라 당시 관료 중에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타어 크라이시크(Lothar Kreyssig) 판사. 허나 희생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T4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는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가족을 요양원으로 보낸 사람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시 찾아오려 했고 여러 방면으로 저항했다. 특히 이런 운동은 [[교회]]에서 가장 활발했다. 결국 히틀러도 감당이 안 되었는지 1941년 폐지를 선언하였다.[* 다만 대놓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후에도 학살은 계속됐는데 이런 상황에 희생되는 것은 늘 의지할 곳 없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주로 무연고자이거나 가족이 있어도 외면당하는 장애인들이 살해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즉,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일을 할 수 없는 인력을 따로 분류해 죽였던 것이 이들의 끔찍한 작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